추억의 첫사랑

서늘한 가을 바람이 불어오는 어느 날, 나는 오래된 앨범을 뒤적이다 한 장의 사진을 발견했다. 그 순간, 내 마음속에 잠자고 있던 추억들이 물밀듯이 쏟아져 나왔다. 그 사진 속 주인공은 다름 아닌 내 첫사랑, 진숙이었다.

1. 기차로 이어진 인연

중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부터 고등학교 1학년이 될 때까지, 나는 매일 아침 기차를 타고 30km나 떨어진 도청 소재지의 학교로 통학했다. 그 시절엔 지금과 달리 한 시간이나 걸리는 긴 여정이었다. 아침저녁으로 단 한 번씩만 운행하는 열차였기에, 한 번이라도 놓치면 그날은 어김없이 결석이었다.

연착이라도 하는 날이면 학교에 지각하기 일쑤였다. 그렇게 매일 같은 열차를 타다 보니 통학생들은 서로 얼굴은 익숙해졌지만, 이름은 잘 몰랐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여학생들이 모여 있는 열차칸을 찾아다니거나, 친구들과 약속한 칸에서 수다를 떨었다. 나는 후자에 속했고, 소수의 학생들은 그 시간을 아까워하며 열심히 공부하기도 했다.

2. 우편엽서의 설렘

어느 날, 같은 열차로 통학하는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우연히 책상 위에 놓인 우편엽서를 보게 되었다. “민호 학생을 알고 싶다”라는 글귀가 적힌 그 엽서의 주인공이 바로 나라는 사실에 가슴이 쿵쾅거렸다. 활달한 성격의 그 친구는 모르는 여학생이 없었고, 나와도 친했기에 그런 엽서를 받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친구는 왠지 심통이 났는지 그 사실을 내게 알리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즉시 용기를 내어 진숙이의 학교로 만나자는 엽서를 보냈다. 그 시절, 남녀 학생의 만남은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진숙이는 담임 선생님께 호된 꾸지람을 들었다고 한다.

3. 설레는 데이트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첫 만남은 기적처럼 이루어졌다. 진숙이의 담임 선생님께서 감시차 따라 나오셨지만, 멀리서 나를 보시고는 깡패 같아 보이지는 않아서인지 조심하라는 당부만 하시고 돌아가셨단다.

진숙이는 학교 근처에서 친구 둘과 자취생활을 하고 있었다. 나는 다음 데이트 약속을 잡아놓고도 보고 싶으면 불쑥 찾아가 창문을 두드렸다. 진숙이의 친구가 나를 알아보고 “민호씨 왔다”라고 말하면, 조금 후에 진숙이가 밖으로 나와 슬며시 내 손을 잡아주곤 했다.

마땅히 갈 곳이 없던 우리는 그저 시내를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데이트의 전부였다. 하지만 그 시간들이 너무나 소중하고 가슴 설레는 순간들이었다.

4. 첫 번째 이별

어느 비가 내리는 저녁, 우리는 2층 비어있는 사무실에서 데이트를 하고 있었다. 창가에 선 진숙이는 내게 머리를 기대었고, 나는 한 팔로 그녀를 안았다. 점점 더 그녀의 몸을 만져보고 싶은 욕망이 일었지만, 나는 그 충동을 억제하고 밖으로 나가자고 제안했다.

거리를 걷던 중, 우리는 칠, 팔 명의 덩치 큰 친구들과 마주쳤다. 그녀 앞에서 용감한 모습을 보이고 싶었던 나는 어리석게도 그들 가운데로 뚫고 지나가려다 싸움에 휘말리고 말았다. 결국 나는 험악한 발길질로 인해 젖은 길바닥에 주저앉았고, 진숙이도 우산대로 머리를 맞아 큰 혹이 생겼다.

부끄러움과 자존심 상함에 휩싸인 나는 “이제 우리 만나지 말자”는 말을 내뱉고 진숙이를 떠나보냈다. 그렇게 우리는 몇 개월간 연락이 끊겼다.

5. 운명적인 재회

봄이 찾아온 어느 날, 나는 시내 중·고등학교 기독학생들을 위한 부흥집회에서 올갠 반주를 맡게 되었다. 집회가 끝나고 계단을 내려오는데, 놀랍게도 진숙이와 그녀의 친구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진숙이의 왈가닥 친구들이 올갠 반주자가 머리를 박박 깎은 학생임을 보고 호기심에 기다렸다고 했다. 그들은 머쓱해서 우리만 남겨두고 떠났고, 우리는 오랜만에 다시 만나 그간의 이야기를 나누며 밤늦게까지 시간을 보냈다.

6. 두 번째 이별

그러나 우리의 재회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학교 졸업과 함께 우리는 각자의 길을 가야 했다. 진숙이는 최신 설비를 갖춘 요소비료 공장에 사무원으로 취직하길 원했고, 나는 진학을 꿈꾸었다.

헤어지기 전, 우리는 2년 후의 크리스마스이브에 다시 만나기로 굳게 약속했다. 하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대학에 진학했지만 한 학기만 마치고 놀고 있던 나는 또다시 쓸데없는 자존심 때문에 약속 장소에 나가지 못했다.

7. 영원한 첫사랑의 기억

세월이 흘러 군대를 다녀오고 대학교 4학년이 되었을 때, 우연히 6촌 동생을 통해 진숙이의 소식을 접했다. 동생이 친구와 같이 공부하던 중 친구가 가진 참고서에서 우연히 내 사진이 떨어졌는데, 그 책의 주인이 바로 그 친구의 형수가 된 진숙이였던 것이다.

나는 진숙이가 나를 잊지 못해 사진을 간직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녀가 과수원집에 시집가서 잘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걸로 족하다.

지금도 가끔 그 시절을 떠올리면 마음 깊은 곳에서 따스함이 올라온다. 시간이 흘러 우리 모두 나이 들고 변해있겠지만, 진숙이는 내 기억 속에서 여전히 그 시절 그대로의 청순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첫사랑의 아련한 기억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 그저 그 시절의 우리처럼, 순수하고 열정적인 모습 그대로 내 마음속에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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