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생활을 통해 배운 하나님의 섭리(새옹지마 塞翁之馬)

제1장 논산훈련소로 향하다

하나님은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때로는 불운처럼 보이는 것이 축복이 되고, 때로는 행운처럼 보이는 것이 시련이 되기도 한다. 1968년, 나는 그저 평범한 휴학생이었다. 그해 1월, 북한 124군부대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 사건으로 전국이 들끓던 그때, 나는 공군으로 입대했다.

“축농증이라니….”

대전 기술교육단 기지 병원에서 받은 진단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재입대를 위해 축농증 수술을 준비하던 중 운명은 나를 다른 길로 이끌었다. 육군 입대. 그때는 몰랐다. 이 예기치 않은 전환이 내 인생에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논산역에 도착한 군용열차 안에서 선배들에게 들었던 무시무시한 이야기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때 누군가 어깨를 툭 쳤다.

“여기서 만날 줄이야!”

성모였다. 대학 동기인 그를 만난 것은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 같았다. 우리는 같은 중대에 배정받았지만, 서로 다른 소대로 나뉘게 되었다.

당시의 나는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는 은밀히 성모가 있는 2소대로 합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원 점검이 시작되었고, 당연히 숫자가 맞지 않았다. 저승사자 같던 기간병이 몽둥이를 들고 으름장을 놓았다.

“자리 바꾼 놈, 당장 나와! 안 나오면 전원 기합이다!” 기간병의 고함 소리가 연병장을 울렸다.

모두가 공포에 떨고 있을 때, 나는 묵묵히 먼 산만 바라보았다. 결국 마음 약한 한 병사가 앞으로 나섰고, 다행히 기간병은 그를 가볍게 한 대 쥐어박고 넘어가 주었다. 그렇게 해서 성모와 나는 같은 내무반에서, 나란히 붙어 앉아 힘든 훈련을 함께할 수 있었다.

우리의 내무반장은 고참 병장이었다. 그는 잘못이 발견되면 주저 없이 M1 소총을 3등 분해하여 개머리판이나 총열로 매질을 하거나, 훈련병들의 머리를 땅에 박게 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나는 주일마다 교회 예배에 참석했다. 연대 군인교회의 반주를 맡았기 때문이다.

“너 오늘 죽었다. 일석점호 때 내무반장이 네 물건 다 집어 던지고 난리 났었다.”

예배를 마치고 돌아올 때마다 동료들이 전해주는 말이었지만, 신기하게도 수료할 때까지 내무반장에게 한 번도 꾸지람을 듣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였다.

제2장 영외부대 풀장사건

전반기 훈련이 끝나고 성모와 나는 갈라섰다. 같은 헌병병과였으나 그는 헌병학교로, 나는 보병으로 병과가 바뀌며 영 외 부대에서 박격포 교육을 받았다. 그곳에서의 풀장 사건은 지금도 생생하다. 훈련병 신분이 내가 겁 없이 영내 풀장에 뛰어든 것까지는 좋았으나 잠시 후 언덕 위 경비초소의 초병이 “야, 훈련병, 내 속옷 좀 빨아 와라.” 하며 속옷을 내 앞으로 집어 던지는 것이 아닌가.

나는 겁이 나면서도 자존심이 상해서 속옷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옷을 챙겨 입은 뒤 우아하게 풀장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러나 몇 발짝 떼기도 전에 서너명의 병사들에 의해 초소 뒤편으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고 다듬지 않은 나무 몽둥이가 엎드려 있는 나의 몸 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제 더 맞으면 죽겠구나’ 생각이 들었을 때 몽둥이세례는 끝이 났다.

젊은 날의 용기, 아니 무모함이 가져온 대가였다.

이곳에서 보안대 요원이 되려는 나의 작은 소망의 끈을 놓아야 하는 좌절의 순간이 있었다.

보안부대 인사과장이 부대를 방문하여 보안부대에 충원할 2명의 요원을 선발할 때 그중 한 명이 되었다. 보안부대의 위세를 아는지라 내무반장도 교육받는 동안 감히 나를 건드리지 못했다.

그러나 교육 수료 후 이유도 모른 채 보안부대가 아닌 전방부대 전출이 확정되었다.

제3장 전방으로 더 먼 전방으로

드디어 춘천 103보충대. 그곳은 우리의 운명이 결정되는 곳이었다. 연병장 앞 수많은 팻말 중에서도 ‘원통리’는 모두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왜냐하면 다른 어느 팻말 앞에 서도 원통리 보다는 후방지역이기 때문이었다.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어쩌나….” 오죽하면 이런 한탄을 했겠는가.

누구나 피하고 싶어 하는 그곳 인제군 북면 원통리. 대기 하는 며칠 동안 나는 매일 원통리만은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하지만 운명이란 것은 참 묘했다. 마지막까지 남은 소수의 인원 중에서 나는 결국 그 원통리행 군용트럭에 오르게 되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모든 것이 새옹지마였다. 공군에서 육군으로, 헌병에서 보병으로, 그리고 마침내 원통리까지. 각각의 순간은 불운처럼 보였지만, 그 속에는 더 큰 하나님의 섭리가 숨어있었는지도 모른다.

해가 저물어 사면이 캄캄한 밤, 원통리로 향하는 트럭 안에서, 나는 문득 깨달았다. 이것이 끝이 아닌 시작이라는 것을. 앞으로 3년, 그 긴 시간 강원도 북단 최전방 고지를 누비며, 나는 또 어떤 새옹지마를 마주하게 될까.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산세를 바라보며, 나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어쩌면 우리 인생이란 게 다 그런 게 아닐까. 불운인 줄 알았던 것이 축복이 되고, 피하고 싶었던 곳에서 오히려 성장하게 되는. 마치 새옹지마의 고사처럼, 우리는 알 수 없는 운명의 물결 속에서 끊임없이 성장해 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제4장 인사과 상벌계

사단사령부 민사과 선발 시 먼저 호명된 내가 하필 그 시간에 사역병으로 동원되어 선발 기회를 놓친 것은 더 기가 막혔다. 그렇게 기대했던 사령부 보직 마저 마치 장난처럼 나를 또 비껴갔다.

결국 나는 ‘원통리’에서 수십 리 전방에 자리 잡은 연대본부 인사과에 배치되었다.

인사과에서 나의 보직은 상벌계였다. 표창과 징계에 관한 공적조서를 작성하고, 자대 영창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영창에 갇힌 병사들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고, 위문편지가 도착하면 제일 먼저 전달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러나 그때는 몰랐다. 훗날 제대 말년에 내가 그 영창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될 줄은….

하지만 그곳도 종착지는 아니었다. 우리 연대는 군사분계선을 직접 방어하는 부대였고, 그중에서도 수색중대는 요즘과 달리 특별한 부대였다. 북한 지역을 넘나들며 공작을 하는 07소대라는 조직이 있었고 대원들도 무술 유단자나 뛰어난 체력을 보유한 병사로 구성되었다. 또한 보충병이 전입되면 모든 부대에 우선하여 충원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어 있었다.

어느 날, 전방에서 작전 중이던 수색 중대장이 내가 자기 고향 후배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는 나를 자기 부대로 데려가고 싶어 했고, 그렇게 나는 다시 휴전선과 더욱 가까운 수색중대 캠프로 다시 이동하게 된 것이다.

제5장 한밤의 총성

수색중대는 남다른 곳이라고 앞서 소개하였다. 영구막사와 지하 석조건물, 캘리버 50 기관포가 설치된 대공초소, 그리고 일반 소총부대는 꿈도 꾸지 못할 지프차와 픽업트럭까지 갖추고 있었다. 나는 중대본부 작전계로 배치되었다.

우리 부대의 일상은 다른 부대와는 사뭇 달랐다. 직할부대로서 독자적으로 운영되었고 동절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병력이 DMZ 수색과 잠복 임무를 수행하느라 전방에 나가 있었기에, 캠프에는 소수의 인원만이 남아있었다. 4킬로미터 반경 내에 아무런 인공물이 없는 허허벌판, 울타리조차 없는 그곳에서 우리는 해 질 녘이면 대공초소의 기관포로 공비가 숨어있을 법한 주변 수풀 더미를 향해 마구 사격을 가한 후 야간에는 소수의 경계병만 배치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운명의 그날이 왔다. 전입 3일 만에 일어난 그 사고는,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행정반 사무실에서 야간 당번을 서던 나에게 중대 부관 책상 옆에 걸린 권총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장전된 줄도, 안전장치가 풀린 줄도 모른 채 나는 권총을 뽑아 들자마자 서부영화의 주인공처럼 멋진 포즈로 느닷없이 방아쇠를 당기고 말았다.

깊은 밤의 적막을 가르는 굉음과 함께 탄환은 사무실과 내부만을 분리해 놓은 격벽 문을 관통한 후 본부 요원들이 촘촘히 누워 자고있는 내무반으로 날아갔다

그 순간 나의 심장도 멈춘 듯했다. 하지만 기적이 일어났다. 탄환은 제대를 목전에 둔 이발병의 머리 위를 간발의 차이로 벗어나 관물대에 박혔다. 분노한 이발병의 발길질과 부관의 매서운 따귀, 고참들의 구타가 쏟아졌지만, 나는 전혀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감사했다. 아무도 다치지 않은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여겨졌기에….

다행히 전방에서 보고를 받은 부대장은 너그럽게 웃어넘겼다. 그리고 더 이상 문제가 생기 않도록 조처해 주었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부대장과는 얼굴 한번 마주하지 못한 채 월남 파병 명령을 받은 그는 임지로 떠나버렸다. 나는 다시 한번 끈 떨어진 연처럼 표류하게 되었으며 인사과에 있던 나를 무책임하게 데려다 놓고 홀연히 떠나버린 부대장에 대한 원망하는 마음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이제 새로운 지휘관을 맞이해야 했다.

제6장 후임 지휘관과의 만남

새로운 부대장의 부임은 우리 부대에 태풍과 같은 변화를 몰고 왔다. 그는 월남 파병부대의 공수특전단 출신으로, 치열한 전투 현장에서 돌아온 터였다. 후방 보직을 기대했던 그가 최전방 발령을 받자, 그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처음에는 모든 병사가 그의 분노의 화살받이가 되었다. 결재판을 들고 들어간 병사마다 그의 분풀이 대상이 되다 보니 고참들은 서로 눈치만 보다가 마침내 ‘회심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제일 막내인 나를 희생양으로 삼기로 한 것이다. 나는 처음에 완강히 거부했다. 하지만 이 고립무원한 산속에서, 하소연할 곳도 없는 내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었을까.

첫날, 결재판을 들고 지하 돌계단을 내려가는 발걸음은 마치 도살장으로 향하는 것 같았다.

떨리는 손으로 문을 노크하고 들어가서 결재판을 든 채 부동자세를 취했다.

그런데, 그간 들어왔던 소문이 무색하게도, 의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결재판은 거기 놓고 이리 와서 앉아.”

부대장은 난로 옆자리를 가리켰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그의 곁에 앉았다. 그리고 그날부터, 예상치 못한 우정이 시작되었다. 그는 월남에서 겪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정글 속 전투의 긴장감, 전우들과의 우정, 때로는 상관에 대한 불만까지. 그의 이야기는 마치 끝없이 이어지는 강물 같았다. 결재는 내용도 보지 않고 사인해 주었다. 아마도 가장 나이 어린 병사를 향한 일종의 연민의 감정이 발동된 것이리라.

그날 이후, 모든 부대의 결재판은 내 책상으로 모여들었다. “급한 건데 좀 부탁해”라며 선임들이 사정하는 광경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 다만, 재미없는 부대장의 인생사를 불가불 들어야 하는 건 작은 대가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의 별것 아닌 재주들이 하나둘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부대장이 각 부대에 폭파 교관으로 출강할 때면, 나는 밤늦게까지 교안 차트를 준비했고 지프차 뒷좌석에서 그의 그림자처럼 항시 동행했다.

야간 근무 때면 작전과 주관으로 각 대대와 직할 중대를 대상으로 하는 음어해독 훈련이 불시에 실시되곤 했다. 따로 담당자를 지정하지 않았으나 부대별 순위가 매겨지다 보니 음어 해독속도가 가장 빠른 나를 전화기 앞으로 불러들였다.

부대장은 캠프를 비울 때는 부관이나 인사계 상사, 심지어 소대장들 마저 제쳐두고 일등병인 나에게 부대를 부탁하고는 마음 편히 돌아다녔다. 현재의 군 편제나 군대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리라. 나는 그의 기대에 부응하듯 상급 부대의 지시 사항이나 일상 업무를 능숙하게 처리했고, 부대원들은 그것을 나와 부대장과의 특별한 교감으로 받아들이는 눈치였다.

그즈음 기억에 남는 건 사단 유격훈련장에서의 일이다.

유격훈련 마지막 날, 캠프에 남아있던 나를 태우러 지프차가 왔다. 훈련장에 도착하니 부대원들이 돼지 한 마리를 통째로 가져와 회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부대장은 뜻밖의 지시를 내렸다. 인근 5MASH(5이동외과병원)에 간호장교로 근무 중인 여동생을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회식 자리에 데려오라는 것이었다. 대위계급 장을 단 간호장교를 어떻게 강제로 데려온단 말인가 걱정이 됐지만, 그건 기우였다.

‘학’이라는 외자 이름을 가진 간호장교는 거친 언사로 간호병들에게 지시를 내리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회식에 초대하자 흔쾌히 지프차 옆자리에 올랐다. 그녀는 나보다 연상이었지만, 우리는 금세 친해져 도착할 때까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고 회식 자리에서도 나란히 앉았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건, 아마도 입대 후 처음으로 이성과 나눈 대화였기 때문일 것이다.

부대 생활 중 가장 즐거웠던 건 주간 출장이었다. 공문수발은 가장 졸병인 내 몫이었기에, 일주일에 한 번은 연대본부에 다녀와야 했다. 차량은 전방에 나가 있어 4km를 걸어서 큰길까지 나가야 했고, 거기서 지나가는 군용트럭을 얻어 타야 했다. 고달픈 여정이었지만, 나는 이 출장길을 진심으로 좋아했다.

수많은 고참의 눈을 벗어나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고, 특히 가을이면 길 좌우에 피어난 형형색색의 코스모스가 나를 반겼다. 비록 근처에 부대도 없고 무장 공비가 출몰하는 위험지대라 카빈총에 30발들이 탄창을 끼우고 바짝 긴장해야 했지만, 그 고독한 걸음 속에서 나는 묘한 평화를 느꼈고 고난에 도전할 용기도 얻을 수 있었다.

지금도 가끔 그 시절을 떠올린다. 4 킬로미터 자갈길을 따라 바람에 흔들리던 청초한 모습의 코스모스는 지금도 내 마음 한켠에 선명하게 피어있다.

이무렵 짧은 위기의 순간을 맞기도 했다. 2급 비밀취급 인가를 받은 나는 비상이 걸리면 금고에 보관된 2급 비밀문서인 ‘한국 방어계획’을 가방에 휴대하고 부대장 곁에서 수행해야 했는데 비상이 종료되고 나서 확인하니 이 서류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지프차 뒷좌석 밑에서 비밀문서를 찾아내기까지 매일 밤 수갑을 차고 군법회의에 회부되는 악몽을 꾸며 공포에 떨었다.

계절이 바뀌고 녹음이 짙은 계절이 찾아오자 우리는 다시 전방으로 향했다. 남방한계선을 따라 설치된 쇠고리 철조망 주변에 있는, 다른 부대 벙커 위에 세워진 열악한 텐트가 본부 지휘소이자 숙소였다. 포탄 한 발이면 박살이 날 수 있는 위험한 적의 표적이었지만, 우리는 그곳에서 초겨울이 될 때까지 견뎌야 했다. 잠귀가 밝은 나는 전화 당번을 혼자 감당하기로 작정하고 나보다 고참이건 후임병이건 모두 재우고 나 홀로 군용전화기 2대를 베개 삼아 잠을 자면서 야간에 전화가 걸려 오면 일어나 있던 사람보다도 더 재빠르게 베고 자던 전화기에서 수화기를 꺼내 들어 응답했다. 이 일은 내가 독단적으로 결정한 일이라 부대장도 아마 몰랐을 것이다.

지금도 가끔 그 시절을 떠올린다. 위험천만했던 실수도, 새로운 지휘관과의 만남도, 간호장교와의 짧은 대화도, 모든 것들이 내 청춘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철조망 너머로 보이던 적의 땅과 함께 그 모든 순간이 내 가슴속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제7장 계급장의 무게

소위 군대 짬밥이 제법 쌓였으나 김신조 사태 여파로 제대와 진급이 미뤄짐에 따라 나는 그때까지도 일등병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진급이 늦어지는 경우 부대 내에서는 종종 미리 한 계급 올려서 계급장을 달고 다니는 관행이 행해지기도 했는데 나는 우리 부대는 물론 상급 부대 방문 시에도 공공연히 상병 행세를 하고 다녔다. 그것이 후에 나를 곤경에 빠뜨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부대 근처에 주둔한 지역헌병대와의 첫 마찰은 주. 부식 조달 과정에서 시작됐다. 1종계를 맡게 된 나는 헌병대의 고압적인 태도에 발끈했고, 전화로 티격태격하다가 “너 누구냐” 하는 말에 “일등병이다, 왜?”라며 도발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헌병대 백차가 도착했다. 그들은 쌀 한 가마니를 가지고 자존심을 상하게 한 잘난 일등병을 보려고 찾아온 것인데 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전화로 당당히 일등병이라고 약을 올렸는데, 여전히 가짜 상병 계급장을 달고 있었으니, 그들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결국 계급 사칭으로 헌병대에 연행되어 밤 늦도록 고초를 겪어야 했다.

그러나 진짜 시련은 그 후에 찾아왔다. 비상령이 내려진 상황, 모든 장병이 완전군장으로 대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는 친한 선임인 이 병장과 함께 위장망만 걸친 채 총도 휴대하지 않고 부대 상징인 개구리 모자만 쓴 채로 단골 주점을 찾았다.

술자리가 한창일 때, 문이 살짝 열렸다가 닫혔다. 순간 지역 헌병 대장의 얼굴이 잠깐 보였다. 눈치 빠른 이 병장은 꽁지가 빠지게 뒷문으로 도망쳤지만, 나는 미련하게도 꿋꿋이 자리를 지켰다. 헌병 대장이 잠깐 문을 닫은 것은 우리를 배려하여 피할 시간을 준 것인데 마지막 한 잔을 더 기울인 것이 화근이었다.

결국 문이 거칠게 다시 열리며 헌병 대장이 호통과 함께 들이닥쳤고,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나는 필사적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때 나를 따라잡지 못한 헌병 대장은 화가 나서 권총 한 발을 전방으로 발사했다. 나를 조준한 것은 아니었으나 뒤에서 벽력같은 총성이 울리고 탄환이 내앞에 있던 바위에 맞아 바위 파편들이 내 쪽으로 우수수 튀어 오르자, 다리에 힘이 풀려 더 이상 도망칠 수가 없었다. 체포된 나는 또다시 그 낯익은 헌병대로 끌려갔다.

하지만 운명은 아이러니했다. 쌀 문제로 크게 다투던 때와는 달리 헌병대와 간헐적으로 필요한 물품을 제공하던 ‘착한 관계’ 덕분에, 이번에는 가벼운 엉덩이 터치로 사건이 마무리됐다. 계급장의 무게는 단순한 금속의 무게가 아니었다. 그것은 책임과 의무의 무게였고, 군인으로서의 자존심이었다.

제8장 비무장지대의 침묵

달이 밝은 밤이면 우연한 기회에 친하게 된 인근 부대 새내기 일병이 보초를 서는 곳을 찾아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도 나와의 대화 시간을 기대하고 같은 시간에 보초를 서려고 노력하는 듯했다. 우리 부대는 다른 중대와는 달리 지프차가 배정된 덕분에 상식이 통하지 않는 부대장은 캠프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곳 작전지에서도 내게 업무를 떠맡기고는 가까운 거진이나 대진해수욕장을 찾거나 자택으로 퇴근하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마음을 졸이며 25,000:1 지도를 펼쳐 야간에 잠복할 DMZ 내 잠복 지점 좌표를 선정하여 야간 잠복을 내보내고 부대장을 찾는 전화가 오면 “지뢰지대 수색 나갔다”고 서투른 거짓말로 둘러대곤 했다. 이런 모험이 가능했던 건 부대장이 나를 신뢰하고, 연대장도 우리 부대장을 아낀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날은 전체 장병들이 단체로 장티푸스 예방주사를 접종한 날이었다. 역시 부대장은 현장을 나에게 맡기고 일찍 퇴근했다. 접종을 마친 병사들은 하루 쉬기를 원했지만, 야간 잠복 작전은 멈출 수 없었다.

잠복 지점에 도착하면 특별한 일이 발생하지 않는 한 사전 약속된 시간에만 무전기를 열어 교신하고 고정된 위치에서 밤을 새워야만 했다. 교신 시간이 도래하자 나는 평소처럼 통신병을 깨우지 않고 무거운 P10 무전기를 등에 메고 고지 위로 뛰어 올라갔다. 당시 무선장비는 통달 거리가 짧아서 고지 위까지 올라가야 원활한 통신이 가능했다.

잠시 후, 잠복조 통신병이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응답했다. “모든 대원이 예방주사로 인한 쇼크 상태로 더 이상 잠복근무를 할 수 없습니다. 당장 철수를 요청합니다!”

나는 비무장지대 작전의 엄중함을 잊은 채 겁도 없이 즉각 철수 명령을 전달했다. 그리고 부대장에게 전화로 보고하자 그의 분노가 폭발했다. “비무장지대 잠복 인원에 대한 보고는 연대와 사단사령부는 물론 1군사령부 상황판에 표기되는 중요한 사항이다. 임의로 변동할 수 없다! 예방주사 쇼크로 죽지는 않아!”

혼비백산한 나는 정신없이 무전기를 다시 메고 고지 위까지 달려 올라가 잠복조와 재차 교신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들은 응답하지 않았다. 원위치 명령이 하달될 것을 예상했는지 무전기를 꺼놓고 유유히 철수를 감행하고 있었다.

진퇴양난의 상황! 만약 우리 잠복조가 사전 통보 없이 경계선에 접근할 경우 아군 초병의 집중사격을 받게 될 것이며 더 끔찍한 것은 철조망 앞으로 접근하는 적을 향해 발사되도록 매설한 [크레이모어] 지뢰 700발의 쇳조각을 만나게 된다는 상황이다. 나는 목이 쉬도록 P10 무전기에 대고 울부짖었지만 끝내 응답은 없었다.

이제는 사단에 보고하여 철수 승인을 받는 것 외에 병사들을 살릴 방법이 없었다. 본부 텐트로 내려와 부대장에게 전화를 걸어 사태의 심각성을 설명하고 경솔한 행동에 대해 사과했다. 그도 자신의 부재로 일등병이 그런 엄청난 명령을 멋대로 하달했다고 밝힐 수는 없는지라 연대본부를 거쳐 사단사령부의 철수 명령을 어렵게 받아냈다.

시간은 촉박했다. 나는 즉시 우리 부대원들의 철수 예상 지역을 관할하는 부대와 각급 초소에 긴급 전화를 돌려 아군 잠복조가 철수 중임을 통지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쇠고리 철조망을 통과하여 철수하는 병사들을 맞이하자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와 동시에 무전기를 꺼놓고 무작정 철수해 온 그들이 너무나 얄밉고, 머리를 한 대씩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제9장 눈썹에 새겨진 무모했던 젊은 날의 흔적

해가 바뀌고 이듬해 다시 전방에 투입되었을 때 우리는 열악한 환경이었던 작년과 달리 양지바른 개활지에 엉성한 통나무집을 지을 수 있었다.

투박하지만 정겨운 2칸짜리 통나무집은 본부 사무실이자 우리의 숙소였다. 앞마당에는 계절을 잊은 듯 야생화 몇 그루가 고개를 내밀었고, 그것은 마치 전쟁의 그림자 속에 피어난 평화의 상징 같았다.

그 시절을 떠올리면, 지금도 쓴웃음이 나오는 한 장면이 있다. 연말이 다가오면서 박정희 대통령의 하사품으로 통조림이 보급된 날이었다.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모든 병사에게 골고루 나눠주었다. 그런데 잠시 후, 하사 한 명이 거칠게 행정반 문을 열고 나타났다. “대통령 하사품인데 하사들에게만 주어야지, 왜 다른 사람에게도 나눠줬습니까!” 그의 분노 섞인 목소리로 항의한 이유는 윗사람이 내려주는 선물을 뜻하는 하사품을 하사에게 주는 물건으로 오해한 것이었다. “다 같이 나누어 먹으면 좋지 않습니까” 변명하면서도 웃음이 나는 걸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인간의 호기심이란 때로는 재앙의 씨앗이 되기도 하니까. 행정반 옆에는 비무장지대 수색 중에 수거한 불발 지뢰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녹슨 고철 덩어리 속에 깃든 위험을 알면서도, 나의 호기심은 점점 커져만 갔다. 격발장치는 고장 났다지만, 그 속에 담긴 장약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충격이나 화기만으로도 폭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무료함이 극에 달했던 어느 늦은 오후, 나는 결국 금기를 깨고 말았다. 마당 한가운데 있던 바위 위에 지뢰 하나를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카빈총이 내 손에서 묵직하게 느껴졌다. ‘발사하고 지뢰가 폭발하기 전에 재빨리 엎드리면 괜찮을 거야.’ 스스로를 향한 이 허술한 위안을 믿으며, 나는 동료들을 안전거리 밖으로 대피시켰다.

바위로부터 10미터 떨어진 곳, 나는 서서쏴 자세를 취했다. 숨을 고르고, 방아쇠를 당겼다. 탄환이 날아가는 찰나의 순간, 나는 번개처럼 몸을 돌려 땅을 향해 엎드렸다. 그러나 내가 맞닥뜨린 것은 땅바닥의 부드러운 잔디가 아니라 뒤쪽에 세워둔 군용차의 날카로운 범퍼 모서리였다.

기적적으로 지뢰는 폭발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오른쪽 눈썹이 범퍼의 날카로운 모서리와 부딪치고 만것이었다. 처음에는 부끄러움에 아무런 통증도 느끼지 못했다.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려는 순간, 부대장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울 봐봐!”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오른쪽 눈썹 한가운데가 깊게 패어 있었다. 그제야 현실감이 밀려왔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공포가 엄습했다. 압박붕대로 상처를 누른 채, 지프차를 타고 인근 대대 의무실로 달렸다.

의무실에는 정식 봉합사조차 없었다. 의무병은 고래 심줄이라는 특이한 대체품을 꺼내 들었다. “피부가 다 죽은 상태라 통증 없을 거예요.” 마취도 하지 않고 시작된 봉합.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하나님의 은혜였다. 단 1센티미터만 아래였어도, 나는 평생 한쪽 눈으로 세상을 보고 살았으리라.

귀대하는 지프차 안에서 나는 다시는 이런 무모한 시도를 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하지만 인생이란 것이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은 법. 그 다짐이 얼마나 가벼운 것이었는지,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만약 그 다짐을 지켰더라면, 내 인생의 새옹지마와도 같은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야 했을 테니까.

지금도 가끔 거울 속에 비치는 눈썹의 흉터를 볼 때면, 그 시절이 떠오른다. 젊음이란 이름으로 용서받을 수 있는 무모함도 있고, 그 무모함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성장해 간다. 그리고 때로는, 그 무모함으로 빚어진 작은 상처가 평생의 교훈이 되어 우리 안에 남는 것이리라.

제10장 무장공비 1명은 사살했으나…

차가운 이슬이 내리는 새벽, 비무장지대의 고요를 깨우는 것은 오직 바람 소리뿐이었다. 부대는 소대별로 이틀에 한 번씩 A, B 두 개 조로 나뉘어 잠복근무를 섰고, 오늘은 최 중사가 지휘하는 B조의 근무 날이었다. 최 중사와 통신병 이 일병은 다른 잠복 인원과 약간 떨어진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다.

비무장지대 잠복 시에는 비가 오는 밤에도 우의 착용을 금한다. 왜냐하면 비가 우의를 때리는 소리에 잠복 위치가 노출될까 염려되기 때문이다. 그러함에도 최 중사는 원래 잠복 경험이 많은지라 이에 개의치 않고 이슬을 피할 목적으로 판초 우의를 꺼내 나뭇가지에 네 귀퉁이를 묶어 간이 지붕을 만들고 전투화까지 옆에 벗어 놓고 잠복을 서고 있었다.

누구도 그 순간을 예측하지 못했다. 새벽안개를 뚫고 날아온 총성이 고요를 깨뜨렸다. 숨어있던 무장 공비들의 기습이었다.

“적이다!” 외침과 함께 격렬한 교전이 시작되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전투에서 최중사는 적 한 명을 사살했지만 자신도 복부에, 총상을 입었고 옆에서 응사하던 통신병도 적의 자동화기에서 발사된 총탄을 피하지 못했다. 두 사람 모두 현장에서 전사 하였다.

수색대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비극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그것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임무에 충실했던 두 전우의 마지막 흔적이었으나 나뭇가지에 걸린 우의, 땅에 놓인 전투화는 그렇지 못했다.

“빨리 처리해야 한다.” 수색대장은 즉시 상황을 파악했다. 전우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서둘러 김중사의 발에 전투화를 신기고, 나무에 걸린 우의를 수거했다. 비무장지대의 특성상 일반 부대의 출입이 제한되어 있었기에, 가장 먼저 도착한 수색대원들은 전우의 마지막 존엄성을 지켜줄 수 있었다.

광범위한 수색 작전이 전개되었지만, 나머지 무장 공비들은 끝내 도주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날의 교훈은 깊이 새겨졌다. 때로는 작은 방심이 큰 희생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전장에서 기본 원칙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제 비무장지대에는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하지만 그 고요 속에는 조국을 위해 산화한 두 전우의 넋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제11장 감찰검열

하얀 서리가 전선을 뒤덮기 시작할 무렵, 우리 부대는 현 캠프 후방 8km 지점의 옛 대대 주둔지로 이전하게 되었다. 수천 평에 달하는 넓은 부지에는 여러 동의 막사가 늘어서 있었고, 담장 너머로는 주점과 다방이 즐비한 마을이 펼쳐져 있었다.

부대 뒤편으로는 맑은 물이 흐르는 제법 큰 시내가 있었다. 아침 세수를 위해 냇가에 나가면 어김없이 마을 주민들이 덫에 걸린 산토끼를 들고 와서 흥정을 붙였다. 그렇게 우리는 자주 신선한 토끼고기를 맛볼 수 있었다.

겨울이면 연대본부에서 최정예 사수들로 구성된 1개 분대의 멧돼지 사냥팀을 운영했다. 한 해 서른 마리가 넘는 멧돼지가 포수들의 총구 앞에서 쓰러졌다. 우리 부대와 연대장 숙소는 철조망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는데, 멧돼지 고기가 연대장 숙소로 들어오는 날이면 숙소 당번병이 내게 살짝 연락을 넣곤 했다. 나는 소주병을 들고 부대와 연결된 비밀스러운 개구멍을 통해 연대장 숙소 주방으로 들어가서, 기름기 하나 없이 담백한 멧돼지 고기를 즐길 수 있었다. 소주 한 잔에 멧돼지 수육 한 점, 그것은 힘든 군 생활 속 작은 위안이자 기쁨이었다.

그 당시 본부 행정반에서 가장 선호하는 보직은 단연 주·부식을 담당하는 1종계였다. 작전으로 고생할 때도 1종계는 항상 부대에 남아 있을 수 있었고, 수색 중대만 따로 공급되는 특별식과 주.부식을 관리하는 권한은 그들에게 적지 않은 특권을 주었다. 우리 부대 1종계는 인하대생이었던 김 병장과 서울대 상과대학 출신의 조 일병, 이렇게 둘이 맡고 있었다. 이들은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다. 그들의 능력은 다른 방향으로도 발휘되었다. 백미는 부대 간에 서로 차용이 가능했고, 월말에 연대 4과에서 정산하는 방식이었다. 이 느슨한 관리 체계는 곧 부정의 온상이 되었다. 1종계의 사인만 있으면 어느 부대든 즉시 쌀을 내어주었고, 그렇게 빼돌려진 쌀은 인근 주점의 쌀독을 채웠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1종계 둘이 동시에 사라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수소문 끝에 알게 된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그들이 밤사이 창고의 쌀 26가마를 ‘제일옥’이라는 주점으로 빼돌리다 보안대에 적발되어 구금된 것이었다.

부대장은 나를 급히 불러들였다.

“교회 다니는 자네밖에 믿을 사람이 없네. 1종계는 자네가 맡아야겠어.”

그의 목소리에는 절박함이 묻어났다.

“곧 감찰검열이 나올 거야. 나까지 구금되면 뒷수습할 사람이 없어 잠시 자리를 비울 테니, 그동안 잘 부탁하네.”

나는 갑자기 떠맡게 된 중책에 어깨가 무거웠다. 전임자들은 구금된 상태고 장부마저 압수당한 터라, 업무 파악조차 쉽지 않았다. 게다가 곧 닥칠 감찰검열까지 준비해야 했다.

밤낮으로 장부를 새로 만들고, 재고량을 맞추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부족한 물량은 인근 부대에서 빌려오고, 남는 것은 개울가에 숨기기도 했다. 눈이 충혈될 정도로 고된 나날이었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감찰참모가 탄 지프차가 정문을 통과하는 순간, 부대 전체가 숨을 죽였다. 몹시 긴장한 부관은 현황 보고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보다 못한 감찰참모가 부대 현황을 비교적 잘 아는 작전계 사병을 찾았고, 결국 내가 나서게 되었다.

나는 떨지 않았다. 직업 군인도 아닌 내가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고 부대 현황은 나보다 잘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부대 현황판을 펼친 후 깔끔하게 브리핑을 마쳤고, 본격적인 감찰이 시작되었다. 다른 업무는 감찰팀의 다른 장교들이 맡았지만, 1종 업무에 대해서는 감찰참모가 직접 나섰고 나는 그와 마주했다.

날카로운 인상에 마른 체격의 감찰참모는 의외로 부드러운 눈빛으로 나를 대했지만, 노련한 감찰참모 앞에서 간간이 드러나는 허점을 감추려고 나는 온갖 기지를 발휘해야 했다. 재고가 맞지 않으면 지도를 펼쳐 좌표를 표시하며 “이 지점에 수색 나간 분대의 열흘 치 식량을 지급했는데 아직 미정산 상태입니다”라는 식으로 넘기려 했다.

감찰 결과는 걱정과 달리 부식 1개 품목의 재고가 장부상 재고보다 많다(즉 병사에게 제대로 급식을 하지 않았다)라는 경미한 지적만 남기고 끝을 맺었다.

어설픈 변명을 눈감아준 것일까, 아니면 내 성실한 태도가 통한 것일까.

하지만 진짜 고난은 그때부터였다. 두 사람이 반출한 쌀은 보안대에 적발된 수량이 다가 아니었다. 이미 빼돌린 양이 적지 않았고 식수 인원이 적은 우리 부대 규모로는 부족한 쌀을 메우는 일이 쉽지 않았다. 소대원들을 설득해 보리쌀 비율을 높이고, 다른 부대와 거래할 때는 수색 중대만의 특별한 위상을 이용하기도 했다. 월 정산차 각 부대 1종계가 모이는 자리에는 수색 중대 특유의 위장복을 입고 다른 부대에는 아직 지급되지 않은 M16 대검을 착용하고 억지를 써서 우리 부대 차용분은 무시하고 받아낼 수량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받아내었으므로 정산이 끝나고 나면 항상 득을 보았다.

물론 이런 방식으로 억지를 써서 얻어낸 쌀은 나중에 그 부대 병사가 휴가를 갈 때면 한 가마니씩 휴가비 조로 돌려주었다.

거의 일 년이 지나고서야 장부와 재고가 일치되었다. 마치 오랜 빚을 갚은 것처럼 가슴이 후련했다.

제12장 부사단장의 호출

감찰검열이 끝나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 무렵, 한 장의 전통문이 내 일상을 뒤흔들었다. 사단 부관부에 들어오라는 갑작스러운 호출이었다. 부대장이 연유를 알아보니 부사단장과의 면담이 예정되어 있다는 것. 그의 얼굴에 스치는 미묘한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은 나는,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것임을 직감했다.

“내일 사단 들어갈 때 말이야….” 부대장이 농담처럼 던진 말에는 진심이 묻어있었다. “세수도 하지 말고 군복은 뚱보처럼 보이게 방한복을 입고 가라.”

사단에서 나를 빼가려 한다는 것을 눈치챈 부대장의 조언이었다. 나 역시 떠나고 싶지 않았기에, 다음 날 아침 구겨진 방한복을 입고 세수도 하지 않은 채 사단 부관부로 향했다.

부관부에서 들은 이야기는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즈음 박정희 대통령은 반공 이념 고취를 위해 사단마다 ‘승공기념관’ 건립을 지시한 상태였다. 전방에 주둔한 사단들은 경쟁적으로 승공기념관을 건립하고, 차별화된 프로그램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우리 사단은 부사단장이 사업을 직접 주관하고 있었다. 기념관 건물은 이미 완공된 상태였으나, 이를 관리하고 VIP 방문 시 안내와 브리핑을 맡길 적임자를 찾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었다. 때마침 우리 부대 쌀가마 절도사건으로 감찰을 나왔던 감찰참모가 부사단장의 고민을 듣게 되었고, “수색 중대 감찰을 나갔을 당시 그 부대 사병 중에 브리핑에 능하고 아주 근성이 독한 놈을 만났었다”며 나를 추천한 것이었다.

관등성명도 모르던 부관부는 예하 연대본부 인사과에 ‘수색중대 작전계에서 1종계로 보직이 바뀐 사병’을 찾도록 지시했고, 그렇게 내 신원이 밝혀져 오늘의 이 상황이 벌어진 것이었다.

부사단장실의 문을 열고 긴장한 얼굴로 앞에 서자 그는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제안을 시작했다. 승공기념관 관리 사병이 되면 제복과 군화까지 항상 새것으로 착용할 수 있고, 방문일정이 없는 경우에는 마음대로 휴식할 수 있으며, 다른 부분도 최고의 대우를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죄송하지만, 우리 부대장과의 약속을 깰 수 없습니다. 수색중대를 떠날 수 없습니다.”

내 거절에 부사단장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고작 상병 한 놈 빠진다고 수색중대가 망하냐?” 그는 버럭 화를 내며 명령 불복종으로 영창에 넣겠다고 협박했다. “내 차에 가서 대기해!”

중사 계급장을 단 운전병에게 인계된 나는 지프차 안에서 착잡한 마음을 달래야 했다. 공연히 부대장과의 의리를 내세워 제안을 거절한 것이 잘한 일인지, 자책과 위안이 교차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일과가 끝나고 나타난 부사단장은 단호했다. “넌 오늘 영창에 가는 거야.” 차가 움직이는 동안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창밖의 낯선 거리를 바라보며 스스로를 달랬다. “죽이기야 하겠나….”

하지만 차가 멈춘 곳은 뜻밖에도 헌병대 영창이 아닌 부사단장의 숙소였다. 당번병 서너 명이 경례를 붙이는 가운데, 부사단장은 나를 거실의 경유 난로 옆에 앉도록 지시하였다. 이윽고 저녁 식사가 차려졌고 저녁 식사를 함께하면서, 나는 수색 중대장이 처음 부임했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결재판을 집어 던지고 정강이를 걷어차는 등 화풀이를 일삼던 그였지만, 고참들의 협박에 못 이겨 떨리는 마음으로 결재판을 들고 들어섰던 나를, 따뜻한 경유 난로 옆에 앉히고 자기의 지나온 이야기를 들려주던 그때. 지금이 그날의 데자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 자리에서 나는 용기를 내어 진심을 털어놓았다. 부대장과의 관계, 남은 복무기간이 길지 않은 점, 그리고 사실 외국인 VIP 방문 시 나의 짧은 영어 실력이 들통날 것이 걱정된다는 점까지. 부사단장은 더 이상의 권유 없이 내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었다.

“알았다. 오늘 밤은 여기서 자고 내일 자대로 돌아가거라.”

그의 마지막 말에는 더 이상의 위압감도, 분노도 없었다. 때로는 거절하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그 용기가 서로에 대한 이해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제13장 산을 울린 총성

겨울 산은 언제나처럼 고요했다. 그 해도 우리 부대는 매년 그랬듯 사냥 조를 편성해 산돼지 사냥에 나섰고 가끔 노루나 산토끼 등으로 우리의 식탁을 풍성하게 했다. 그저 일상적인 일이었다.

그날도 평범한 작전 수행일이 될 거라 생각했다. “움직임 발견!”

순간 적막을 깨고 울린 병사의 외침에 우리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거대한 몸집의 곰이 숲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나라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희귀한 존재였다.

“사격!”

명령이 떨어지자, 총성이 산자락을 울렸다. 하지만 곰은 쉽게 쓰러지지 않았다. 여러 발의 탄환을 맞고도 그것은 마치 전설 속의 괴물처럼 언덕배기를 향해 질주했다. 우리 병사들의 눈에서는 불꽃이 튀었다. 이제 이것은 단순한 사냥이 아닌, 우리의 자존심을 건 승부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다른 부대와 달리 신형 M16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는데 아직도 구식 M1 소총을 들고 있던 김 일병이 숨을 고르며 조준경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영하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반짝였다. 곰은 이제 언덕 정상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쏘지 마! 내가 하겠다!”

김 일병의 외침과 함께 두 번째 사격이 이어졌다. 정확한 조준이었다. 드디어 그 거대한 몸집이 휘청거리더니, 언덕을 넘지 못한 채 그대로 쓰러졌다.

순간 산 전체가 침묵에 빠졌다가, 이내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전문 사냥꾼도 아닌 우리 군인들이 우연히 만난 곰을 사살한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부대 안에서는 이 공로가 무장간첩 한 명을 사살한 것에 버금간다는 이야기까지 돌았다.

새로 부임한 지휘관 아래서 이룬 첫 공로였다. 물론 이 일은 사단까지만 보고되었고, 그 귀하다는 웅담은 통 채로 사단장의 몫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그날의 기억, 한 몸이 되어 움직였던 전우들의 호흡, 그리고 우리가 이뤄낸 그 특별한 순간이야말로 진정한 보물이었으니까.

지금도 가끔 그날을 떠올리면, 차가운 겨울 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졌던 우리들의 함성이 귓가에 생생하다. 그리고 그때의 우리는, 진정 하나였다.

제14장 전투력 점검의 날

이슬이 내리던 새벽, 나는 상황실 창문 너머로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사단장이 참관하는 전투력 점검이 있는 날이었다. 지난 몇 개월 나는 조용히 맡겨진 일에 충실 했음에도 전임 지휘관의 신임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부대장의 미움을 받고 있었다.

“상황실로 와.” 부대장의 불편한 목소리가 무전기를 타고 들려왔다. 나는 그의 목소리에서 어떤 불안감을 읽을 수 있었다. 현재 작전계를 맡고 있는 병사가 미덥지 않은 그는 결국 나를 불러 들였다.

음어해독…. 2년 만에 마주하는 암호문을 보며 나는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마치 오랜 벗을 만난 것처럼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풀려나갔다. 해독된 메시지들이 하나둘 전파되어 나가는 동안, 나는 무언가 달라질 수 있을 거란 희망을 걸었지만 현실은 달랐다. 전투력 점검은 지휘관의 우왕좌왕으로 인해 기대 이하의 결과를 얻었다. 그러나 부대장의 얼굴에는 이상하리만치 여유가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다른 카드가 준비되어 있었으니까.

“사단장님, 기억하시죠? 지난번 그 웅담 말입니다….” 상황실 한편에서 들려오는 부대장의 아부성 발언에 나는 고개를 숙였다. 작년 겨울, 우리 부대가 포획한 곰의 웅담. 그것은 부대장이 사단장의 환심을 사기 위해 바친 선물이었다. 하지만 그 웅담을 얻기 위해 위험을 감수했던 병사들의 이야기는 언급이 없었다.

상황실을 나서며, 나는 다시 한번 별이 빛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 빛나는 저 별들처럼 우리는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빛나고 있다. 비록 그 빛이 때로는 다른 이의 그림자에 가려질지라도.

제15장 겨울 영창의 크리스마스

부대 주. 부식과 특식을 관리하던 나는, 지프차에 장착한 작은 트레일러에 쌀가마니를 싣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림을 꾸리는 영외 거주 장교들과 하사관가족에게 전달하곤 했는데 오랜 관행이었지만 그것은 분명히 불법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파문이 일었다. 우리 부대의 전임 부대장이 의정부 2군수사로 옮겨가 새로 부임한 연대장이 속이 상한 모양이었다. 수색 중대장을 자신의 참모로 삼고자 했던 연대장의 바람을 저버리고 군수사령부를 선택한 전임 부대장에 대한 배신감이 컸던 그는

“비리가 있다면 찾아내라.” 고 부하들에게 하달하였고, 가장 손쉽게 찾을 수 있는 비리는 다름 아닌 우리가 해오던 일상적인 쌀 배급이었다. 순식간에 나는 군용물 절도범이 되어 2, 4종계를 담당하던 이 병장과 함께, 내가 전입 초기에 인사과에서 담당했던 바로 그 부대 영창에 수감되었다.

한겨울의 영창은 냉혹한 추위가 몰아쳤다. 난로도 없는 엉성한 돌벽 사이로 매서운 바람이 스며들었고 우리 둘뿐인 영창은 인기척마저 차갑게 식어버렸다. 밤이면 열 장이 넘는 모포를 덮어도 뼛속까지 파고드는 추위를 막을 수 없었다.

그나마 조그만 위안이 있다면, 초소를 서는 갓 전입한 이등병들이었다. 허리띠도 풀고 군화 끈도 제거한 채 수감된 우리였지만, 24시간 총을 들고 감시하는 초병은 갓 전입온 이등병들이 대부분이라 오히려 우리의 심부름꾼이 되어주었다.

“어이, 이병!” “네!” “우리 밥 좀 타와라.” “제 총 좀 맡아주세요.”

순진한 이등병은 총을 맡기고 식당으로 달려가곤 했다. 그렇게 주간의 시간은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몇 주가 지나고 성탄절이 다가왔다. 우리는 크리스마스이브만큼은 석방해 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전임 부대장에 대한 미움이 얼마나 깊었던지, 한 해가 저물도록 우리는 그 차가운 돌벽 속에 갇혀 있어야 했다.

마침내 새해가 밝아서야 우리는 부대로 복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영창의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벽난로가 설치된 따뜻한 막사로 돌아온 우리의 몸은 오히려 온기를 견디지 못했다. 온몸이 따갑고 가려운 고통에 시달려 적응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금도 가끔 그 겨울을 떠올린다. 쌀가마니를 실은 작은 트레일러를 끌고 산타처럼 돌아다니던 나의 모습, 그리고 그 선의가 불러온 차가운 돌벽 속의 크리스마스를. 그때의 추위는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선명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가 나누었던 온기 또한 잊을 수 없다.

제16장 마지막 새옹지마

만기 전역이 가까운 시점에 영창까지 다녀온 나는 긴 36개월 군 생활을 돌이켜보게 되었다. 스스로 자초한 고된 일과들, 때로는 과도한 호기심으로 자신을 위험에 빠뜨렸던 순간들, 그리고 끝없이 반복되었던 실수 들…. 이 모든 일을 돌아보니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고, 지친 마음은 이제 평안함만을 갈구하고 있었다.

매주 일요일, 나는 군인교회에서 오르간 반주를 맡아왔다. 흔들리는 손가락 끝에서 울리는 찬송가 선율은 잠시나마 내 마음에 평화를 가져다주곤 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군종과 근무였다. 남은 복무기간을 조용히 마무리할 수 있는 완벽한 방법이라 생각했다.

군종과에 찾아가서 조심스레 부탁을 드렸다. “목사님, 전역할 때까지 군종과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목사님은 흔쾌히 승낙하셨고, 그 자리에서 바로 부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상황은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부대장은 군목의 정중한 요청에 험한 말을 섞어가며 단칼에 거절했다. 부대에 복귀한 뒤에는 나를 향해 전라도 사투리로 으름장을 놓았다. “다시 이런 전화하면 군목 대갈박을 까버리린다고 해!” 이제껏 들어보지 못한 상스러운 욕이었다.

상심한 나의 마음과는 달리, 이 사건은 뜻밖의 반전을 가져왔다. 이를 계기로 그동안 나를 관찰해 온 그가 곁에 두고 싶은 마음을 숨기지 않고 자신의 마음 문을 연 것이다. 그때부터 평소에는 엄격하기로 소문난 부대장이 나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할 만큼 친근한 사이가 되었다.

새옹지마라 했던가. 군종과 발령이라는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도리어 부대장의 신임을 얻게 되어 남은 군 생활을 평안하게 보낼 수 있었다. 가끔은 실패한 것 같은 순간이 인생의 또 다른 전환점이 되는 법이다.

부대장의 거친 말투 속에 숨어있던 관심과 애정을 이해하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그는 나름의 방식으로 문제 많았던 나를 지켜주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전역을 앞두고 돌아보니, 이 모든 우여곡절이 오히려 감사한 추억으로 남게 되었다.

그렇게 나의 군 생활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돌아가며, 마지막 페이지를 향해 조용히 달려가고 있었다. 때로는 원하는 길이 막힌 것이 더 큰 축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이 경험을 통해 배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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