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따스한 햇살이 창가로 스며드는 3월의 어느 날, 나는 인생의 첫 번째 큰 좌절을 맛보았다. 당시 도내에서 가장 경쟁율이 높은 사범학교 병설중학교 입학시험 결과가 발표되던 그 순간, 나의 이름은 합격자 명단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할머니, 저… 떨어졌어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들려오는 할머니의 한숨 소리가 가슴을 아프게 했다. 할머니의 간절한 소원이었던 ‘선생님’의 꿈은 그렇게 멀어져 갔다.
“괜찮아, 우리 손주. 넌 어디를 가든 잘할 거야. 할미는 네가 자랑스럽단다.”
할머니의 따뜻한 위로에도 불구하고, 나의 마음속엔 작은 균열이 생겼다. 명문인 ㅊ중학교라는 안전한 선택지마저 놓쳐버린 나는 그렇게 평범한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첫 등교 날, 나는 쓰라린 패배감을 안고 새 교복을 입었다.
1960년, 대한민국은 격변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4.19 혁명의 여파로 전국이 들썩이던 그때, 우리 같은 어린 중학생들도 그 열기에 휩싸였다. 교실에서는 수업 대신 정치 이야기가 오갔고, 선생님들조차 어쩔 줄 모르는 듯했다.
어느 날 오후, 갑자기 교실 문이 열리며 3학년 선배들이 몽둥이를 들고 들이닥쳤다.
“야, 1학년들! 모두 나와! 우리도 이 나라의 주인이다!”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복도로 나가보니, 온 학교가 발칵 뒤집혀 있었다. 선배들은 우리를 이끌고 거리로 나갔다. 처음으로 경험하는 시위. 두려움과 흥분이 교차했다.
도청 앞에 모인 수백 명의 학생들. 그 순간 나는 역사의 한 페이지 속에 서 있었다. ‘독재 타도!’, ‘민주주의 만세!’ 구호가 하늘을 찔렀다. 그때, 누군가 소리쳤다.
“야, 교장 선생님이다!”
모두의 시선이 도청 담벼락 위에 선 우리 학교 교장 선생님께로 향했다. 선생님의 눈가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여러분,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게 아닙니다. 여러분의 열정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학교로, 집으로 돌아갑시다.”
그 말씀에 우리는 하나둘 발걸음을 돌렸다. 그날 나는 진정한 리더십이 무엇인지 배웠다.
학창 시절, 나는 허세로 가득 찬 ‘짱’이 되고자 했다. 옆자리의 재민이를 괴롭히며 우쭐했던 그때, 나는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모른다.
“야, 재민아. 내 숙제 좀 해와.” “응, 알았어…”
하지만 그 허세가 무너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느 날, 재민이가 갑자기 반격해 왔다. 그의 주먹이 내 얼굴에 꽂혔고, 난 그대로 쓰러졌다.
그 일을 계기로 서열이 바뀌어 재민이는 학급의 짱이 되었고 허세 부리던 난 귀퉁이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막걸리 사건’. 지금도 그날을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해진다.
무더운 여름날, 점심시간이었다. 나와 민구는 별 생각 없이 학교 근처 막걸리집으로 향했다.
“야, 진짜 마실 거야?” 민구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당연하지. 우리가 어른이랑 뭐가 달라?”
우리에겐 그저 작은 모험이었다. 한 대접씩 막걸리를 마시고 입을 닦으며 나오는데,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담임 선생님이 맞은편 이발소 창문으로 우리를 빤히 보고 계신 것이 아닌가.
“야, 민구야… 큰일났다.”
하지만 민구는 의외로 태연했다.
“걱정 마. 지금이 어떤 시댄데? 우리가 4.19를 일으킨 주역이야.”
그의 말에 용기를 얻어 우리는 일부러 큰 소리로 떠들며 교실로 돌아갔다. 하지만 속으로는 벌벌 떨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담임 선생님은 평소와 다름없이 수업을 하셨고, 우리를 부르지도 않으셨다.
며칠이 지나고 우리의 긴장이 풀어졌을 때, 담임 선생님이 나를 따로 불렀다.
“너희들, 그날 뭐 마셨니?”
순간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하지만 선생님의 표정은 의외로 부드러웠다.
“선생님… 저희가…”
“알아, 다 알아. 너희가 얼마나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내고 있는지. 하지만 기억해라. 진정한 용기는 남몰래 자신을 절제하는 거야.”
그 말씀에 나는 고개를 숙였다. 부끄러움과 동시에 감사함이 밀려왔다.
“앞으로 그런 짓 하지 마라. 너희의 미래가 걱정돼서 그래.”
선생님의 눈빛에서 나는 진심 어린 걱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조금 더 성숙해진 것 같았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중년이 된 나. 가끔 그 시절을 떠올리면 웃음이 나기도 하고,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한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성장한다. 때론 좌절도 하고, 실수도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우리를 만들어간다. 나의 중학교 시절은 바로 그런 성장의 이야기였다.
이제 나는 안다. 진정한 스승은 책상 앞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순간에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교훈들이 우리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 간다는 것을. 때로는 엄한 훈계보다 따뜻한 이해가 우리를 더 크게 성장시킨다는 것도.
그 시절의 추억들은 이제 내 삶의 귀중한 밑거름이 되었다. 혼란스러웠지만 열정 넘치던 그때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그리고 나는 그 모든 순간들에 감사한다.
창밖으로 보이는 교정의 벚꽃이 흩날린다. 마치 그때의 내 모습처럼.
